저녁 8시 32분. 집 안의 전등은 훤하게 거실을 밝히고 있지만, 제 마음은 갈 길을 잃은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올해로 마흔여덟, 20년 넘게 공무원으로 일하며 나름대로 질서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이 15살 아들 녀석 앞에서는 그 모든 원칙이 무너져 내립니다. 수학 학원이 끝나자마자 가방만 던져두고 나간 아이는 2시간째 소식이 없습니다. 스마트폰도 제 손에 있는데 말이죠.
답답함에 눈물이 고이고 삶이 괴로움의 연속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가슴을 후벼 팝니다. 하지만 이 혼란 속에서 저는 뒷산을 오르며, 그리고 법륜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세 가지 원칙을 세워보았습니다. 저와 같은 길을 걷는 엄마들과 이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 자식은 나의 분신이 아닌 별개의 우주임을 인정하라
평소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냉혈한 같은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자식 앞에서만큼은 이기적이지 못했습니다. 한없이 이타주의자가 되어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목을 맸습니다. 하지만 뒷산 전망대까지 왕복 1시간을 걸으며 깨달았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내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나의 '욕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요.
아들은 아직 어린 15살이 아니라, 이제 어엿한 15살입니다. 내가 보호해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저항하며 나가는 하나의 인격체입니다. 내가 감히 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통제할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신경전을 끝내는 첫걸음입니다.
두 번째, 스마트폰이라는 도파민의 늪에서 '전략적 후퇴'하기
저는 스마트폰이 청소년의 뇌를 마비시킨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철저히 신봉합니다. 뇌에 관련된 책을 섭렵한 결과 그 어떤 전문가도 스마트폰이 뇌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숏츠의 휘황찬란한 영상이 사고 능력을 앗아간다는 사실에 집요하게 아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막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집요함'이 오히려 아이를 집 밖으로 밀어낸 것은 아닐까 자문해 봅니다.
무조건적인 금지보다는 유연한 허용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고리타분한 공무원이라서, 혹은 내 안의 갑갑한 습성이 아이를 옭아맨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때로는 간섭보다 관조가 아이의 뇌를 지키는 더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그 혼란스러운 경계 위에서 저는 중심을 잡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세 번째, 부모 자신의 평화를 아이의 행동에 맡기지 말라
아들이 늦게 들어온다고 해서 내 인생이 무너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아껴야 합니다. 나를 아낀다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나를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가 밖에서 안 좋은 일을 저지를까 봐 기우에 빠져 울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누리는 사소한 사치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얼굴에 붙인 녹두팩의 시원함, 방금 먹은 망고의 달콤함, 그리고 열 손가락으로 나의 생각을 쏟아낼 수 있는 이 컴퓨터 앞의 시간. 이 모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사치입니까. 아이가 9시 30분에 문을 열고 들어올 때, 화를 쏟아내기보다는 오늘 읽은 책 깨달음의 법륜 스님처럼 심플하게 반응해 보려 합니다. "학원도 다녀오고, 학교도 잘 다녀왔으니 그것으로 됐다"라고요. 그냥 그저 놔주어라. 이 말을 다시 마음속에 새깁니다.

마치며: 밤이 가면 반드시 아침이 오듯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파도는 밀려왔다 반드시 빠져나갑니다. 지금 아들의 저항도 인생의 한 장면일 뿐입니다. 이 괴로움은 저를 깨어있게 해주는 성불의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미래의 어느 날, 오늘 이 밤의 고통을 떠올리며 "참 아무것도 아니었지"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저만의 아름다움 속에서 저를 아끼며 살아가기로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그 누구보다 나를 아끼려고 합니다. 나를 존중하면 타인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말을 마음속에 품고 있습니다. 이제 아들을 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