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테랑 공직자도 무너뜨리는 무적의 민원인
공직 생활 20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다고 자부해 왔습니다. 앞뒤 꽉 막힌 규정을 들고 와 앞뒤 따지지 않고 억지를 부리는 민원인 수천 명을 상대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지켜준 것은 '평정심'이라는 단단한 갑옷이었습니다. 행정 절차법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안을 제시하며 상황을 통제하는 것. 그것이 제 전문성이자 지난 세월 저를 버티게 한 직업적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저는 베테랑 행정 전문가에서 한낱 '초보 수행자'로 전락합니다. 그 어떤 법령으로도 해석이 안 되고, 정부 매뉴얼로도 응대가 불가능한 가장 강력하고 신경 쓰이는 적수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중학교 2학년, 까칠함이 우주최강인 제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내뱉는 단 세 글자의 무적 논리, "몰라요" 한 마디에 20년 공직 경력으로 쌓아 올린 평정심은 맥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2. 행정적 의사소통과 사춘기식 침묵의 괴리
본래 행정 업무에서의 소통은 '명확성'과 '근거'가 생명입니다. 상급자가 질문을 던지면 하급자는 보고를 해야 하고, 민원인이 질의하면 행정청은 정해진 기한 내에 답변해야 합니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학원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요즘 고민되는 건 없니?"라는 부모의 질문은 저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현황 파악' 단계입니다.
하지만 아이의 답변 시스템은 오류가 난 것처럼 똑같은 메시지만을 출력합니다. "몰라요." 처음에는 이 답변이 단순한 '정보의 부재'를 뜻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물었죠. 행정 조사를 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더 굳게 닫힌 입과 짜증 섞인 눈빛, 그리고 "그냥 몰라요!"라는 날 선 반응뿐이었습니다.
행정 실무에서라면 '답변 거부'나 '불성실 응답'으로 처리하고 종결짓겠지만, 자녀 교육이라는 현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저의 지독한 '부모 수행'이 시작됩니다. 아이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하고, 나의 들끓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이것은 제가 평생 다뤄온 그 어떤 복합 민원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 중 난제였습니다.
3. 밤 11시의 연락 두절, 평정심이 분노로 치닫는 순간

얼마 전, 저의 수행 능력을 시험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밤 10시가 지나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통금 10시'라는 우리 집 내부 지침을 정면으로 위반한 상황이었습니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공허하게 울릴 뿐,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20년 공직 생활 중 겪었던 그 어떤 긴급 재난 상황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온갖 부정적인 시나리오가 행정 보고서처럼 나열되었습니다. 사고가 난 건 아닐까, 나쁜 길로 빠진 건 아닐까. 불안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감히 연락도 없이 이 시간까지...'
밤 11시, 겨우 도착한 문자 한 통은 제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했습니다. "친구들이랑 놀러 갔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도대체 왜 연락은 안 받고, 이 시간까지 밖에서 무얼 하는 건지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온 문자가 저를 더 기막히게 했습니다. "택시가 안 잡혀요. 데리러 오세요."
4. 안도와 분노 사이, 차 안에서의 고독한 수행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를 몰아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차에 타는 아이를 보자마자 폭언이라도 쏟아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제 마음속에서는 안도의 마음과 분노의 마음이 격렬하게 갈팡질팡했습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게 내 욕심일까?', '같이 늦은 다른 4명의 아이 부모들도 나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을까?', '나만 유난스러운 엄마인 걸까?'
아이의 무사 귀환에 감사해야 할지, 무책임한 태도를 호되게 꾸짖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용납이 안 되는 건 '전화 한 통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기준에서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상호 신뢰의 파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다시 한번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나도 인간이다. 열받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이 감정 그대로 폭발하면, 오늘 밤 우리는 영영 대화의 문을 닫게 될 것이다."
5. "몰라요"를 '상태'로 읽어내는 행정적 유연함
- 감정의 과부하: 아이는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설명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몰라요"라는 짧은 키워드로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 에너지 고갈: 또래 집단에서의 생존과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부모의 질문에 답변할 '데이터 처리 용량'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 독립의 선포: 연락을 끊고 늦게까지 노는 행위는, 부모의 통제권(관할 구역)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서툰 독립의 신호였습니다.
6. 수행의 결론: 부모라는 이름의 영원한 수습 공무원
사춘기 부모 수행 1년 차, 저는 이제 깨닫습니다. 아이를 제 매뉴얼대로 바꾸려 하는 것이 가장 큰 오만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행정에는 정답이 있고 규정이 있지만, 사람의 마음, 특히 사춘기 자녀의 마음에는 정해진 규격이 없습니다.
- 즉각적인 '처분'을 보류한다: 화가 날 때는 3초가 아니라 30분을 기다립니다. 감정적인 처분은 언제나 행정 심판(자녀의 반발)을 부르기 마련입니다.
- 질문 대신 '공유'한다: 아이의 현황을 캐묻지 않고, 제 일상을 먼저 보여줍니다.
- 침묵을 '답변'으로 인정한다: 대화가 끊겨도 어색해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은 아이가 자신을 정리하는 '공청회' 시간임을 인정해 줍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춘기 부모님들, 우리 모두는 부모라는 보직을 처음 맡은 '영원한 수습 공무원'이니까요. 함께 수행하며 이 터널을 지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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