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 30분, 진작 학원에 갔어야 할 아들이 집에 덩그러니 앉아 열심히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 모습을 마주했습니다. 순간 1차적인 분노가 뜨겁게 치밀어 올랐습니다. 20년 넘게 공무원으로 살며 정해진 규율과 원칙을 생명처럼 여겨온 저에게, '당연히 가야 할 학원'을 빼먹은 아들의 행동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정 오류'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핏대를 높였을 상황에서, 저는 오늘 뒷산 산책의 기운을 빌려 30초간 아들을 조용히 쏘아보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쏟아지는 물줄기에 분노를 흘려보냈습니다. 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자식과 이토록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맺으며 괴로워해야 할까요? 오늘 저는 그 답을 '역할론'과 '마음먹기'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첫 번째, 나는 '엄마'라는 역할을 맡은 배우일 뿐입니다

오늘 점심 커피를 마시며 동료와 나눈 대화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영화 '호빗'에서 주인공이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가혹한 운명의 반지가 주어졌느냐고 묻자, 간달프는 그것이 너의 역할이니 그저 지고 가면 된다고 답합니다. 저 역시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까칠한 중2 아들의 엄마'라는 배역을 맡았을 뿐입니다. 아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내가 못나서도, 교육이 잘못되어서도 아닙니다. 그저 그 배역에 주어진 시나리오일 뿐이죠.
아들을 나의 분신이나 소유물로 생각하면 통제권이 발동하고 갈등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제가 저 자신을 마네킹처럼 여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아, 내가 지금 엄마 역할을 수행 중이구나'라고 인지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아이의 반항은 제 인격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배역 대 배역으로 부딪히는 한 가지 에피소드일 뿐입니다.
두 번째,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고 있지는 않나요?
어제 있었던 주차장 에피소드는 저를 깊이 반성하게 했습니다. 관리원에게 고함을 치는 40대 여성과 그 뒤에서 주눅 든 아이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지만, 이내 제 뒷모습이 투영되었습니다. 아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정작 저는 주말 내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배달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공무원의 습성인 '갑갑함'과 '고리타분함'으로 내 아이를 숨 막히게 하지는 않았는지요.
아이의 모습은 결국 부모인 나의 그림자입니다. 나에게 있는 어떤 습관과 태도가 아이에게 전해져 저런 저항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조용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아이를 통제하기 전에 나의 말 없는 행동이 아이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를 먼저 다스릴 때, 비로소 아이를 향한 분노의 불길도 잦아듭니다.
세 번째, 해골바가지의 물처럼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원효대사가 어둠 속에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마셨던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결국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들이 학원을 빼먹은 사건 자체는 불행이 아닙니다. 그것을 '내 인생의 실패'나 '아이의 타락'으로 규정짓는 나의 마음이 불행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오늘 삐딱하게 구는 아들이 고맙기까지 합니다. 평범하고 무미건조했을 하루에 이런 깊은 성찰의 기회를 주었으니까요. 아들 덕분에 저는 법륜 스님의 지혜를 빌리고, 오은영 선생님처럼 내 아이를 헤아리며, 더 고상하고 단단한 인격으로 성장해 갑니다. 고통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듯, 아들의 저항은 저를 깨어 있게 만드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고맙습니다.
마치며: 오늘도 녹두팩 한 장에 감사를 담아
밤이 깊었습니다. 저는 내 귀한 아들에게 버럭 화를 쏟아내는 대신, 열 손가락으로 이 글을 쓸 수 있는 건강함에 감사하고, 시원한 녹두팩을 얼굴에 붙이며 저 자신을 아껴주려 합니다. 미래에서 오늘을 돌아보면, 이 모든 신경전은 그저 한 편의 성장 드라마 속 작은 갈등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은 제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사고방식을 바꿀 것입니다. 아들은 아들의 인생을 살고, 나는 나만의 아름다움을 지키며 엄마라는 배역을 멋지게 수행하면 그만입니다. 세상의 모든 중2 엄마들이여, 오늘 밤 우리 자신을 먼저 안아줍시다. 우리는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