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아들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내 아들의 닫힌 마음 앞에서 저는 속수무책입니다. 말을 걸면 짜증 섞인 반응만 돌아오니, 어느덧 대화는 끊기고 집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흐릅니다. 오늘 저는 출근길에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래, 아들을 귀한 손님 모시듯이 여겨보자"라고요.
자식을 키우는 일은 진정 어른이 되기 위한 수행길입니다. 왜 남의 자식들은 순하고 모범적인데, 유독 내 아들은 나의 괴로움을 이토록 건드리는지 개탄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저에게 주어진 '엄마'라는 역할임을 받아들입니다. 오늘은 제가 겪은 소통의 단절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기록을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 '부모'라는 권위를 내려놓고 '손님'으로 대접하기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는 예의를 갖추면서, 왜 자식에게는 엄마의 뜻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을까요?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가장 편해야 할 집이 마치 검문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4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아들에게 집은 휴식처가 아닌 감시와 통제의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을 통해 들은 아들의 학교 생활은 의외로 활발했습니다. 집에서는 침묵하지만 밖에서는 발표도 잘한다는 아들. 그 괴리는 결국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불편함에서 기인한 것이었죠.
저는 이제 아들을 우리 집에 머무는 '아주 귀한 손님'이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손님에게 함부로 잔소리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않듯, 아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럽게 반응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나이듯, 아들도 그저 아들일 뿐입니다. 그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소통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 사춘기라는 '폭풍'을 견디는 부모의 마인드셋
스티브 잡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빌 게이츠. 인류의 역사를 바꾼 천재들의 전기문을 읽으며 저는 묘한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들 역시 학창 시절 결코 모범적인 모습은 아니었더군요. 제 아들의 까칠함이 단순히 사춘기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성향이라 할지라도, 이 에너지가 훗날 어떤 창의적 씨앗이 될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 현재의 괴로움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제가 정리해 본 '소통의 3단계 가이드'입니다.
| 단계 | 부모의 행동 지침 | 마음가짐 (핵심 키워드) |
|---|---|---|
| 1단계: 관조하기 | 말을 걸기보다 아이의 상태를 조용히 지켜본다. | 무심(無心) - 마네킹처럼 |
| 2단계: 공감하기 | 아이가 짜증을 낼 때 "너도 참 답답하겠구나"라고 인정한다. | 역지사지(易地思之) - 손님 대접 |
| 3단계: 거리두기 | 아들은 아들, 나는 나. 심리적 선을 긋는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평화 유지 |
세 번째, 말 없는 행동으로 본(本)을 보이는 수행
주차장에서 관리원에게 소리치던 여성의 뒷모습에서 주눅 든 아이를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듯, 저 역시 아들에게 통제만 앞세우고 정작 제 삶의 뒷모습은 흐트러져 있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주말 내내 소파에 누워 에너지를 회복한답시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 퇴근 후 피곤하다는 핑계로 배달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던 날들. 아이는 부모의 말보다 뒷모습을 보며 자랍니다.
이제 저는 아들에게 말을 잘하려고 애쓰기보다, 제가 먼저 단단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려 합니다. 오늘도 해발 143미터 아파트 뒷산을 묵묵히 오르며 제 안의 괴로움을 흘려보냈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아끼고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갈 때, 아들 또한 그 평온함의 기운을 전해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불교를 믿지는 않지만, 법륜 스님이 말씀하신 '나를 깨어 있게 하는 성불의 기회'가 바로 지금 이 순간임을 깨닫습니다.
마치며: 미래에서 빌려온 안경으로 오늘을 봅니다
이 사춘기가 평생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10년 뒤, 20년 뒤 아들과 나란히 앉아 오늘 이 밤의 신경전을 이야기하며 웃을 날이 분명 오겠지요. 그날의 안경을 빌려 오늘을 바라보니, 늦게 들어오는 아들도, 학원을 빼먹는 아들도 그저 '성장'이라는 반지를 지고 가는 귀여운 호빗처럼 느껴집니다.
오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을 먹으며 이 글을 씁니다. 이런 사소한 사치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아들에게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는 따뜻한 눈인사를 건네보려 합니다. 모든 것은 제 마음먹기에 달렸으니까요.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